2021년 9월 19일 주일저녁예배"그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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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9장을 중심으로 ‘그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에스더 마지막 부분인데 크게는 두 부분으로 나눠 볼 수 있습니다. 먼저 1절부터 16절까지는 유다 백성이 대적을 맞서 승리를 쟁취하는 내용입니다.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유다인들이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일하셨던 하나님의 은혜로 건짐을 받았습니다. 이 기막힌 반전의 결과가 에스더 9장 전반부 입니다.
그리고 본문 17절부터 32절까지는 이 반전의 역사를 길이 길이 기념하게 된 부림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부림절은 유다인들이 대적에 손에서 벗어나 슬픔 대신 기쁨을 누리고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합니다.
먼저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아달월 곧 열두째 달 십삼일은 왕의 어명을 시행하게 된 날이라 유다인의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 날에”
1절을 자세히 주목해보면 두 날에 관한 말씀입니다. 첫째는 “아달월 곧 열두째 달 십삼일”입니다. 여러분 이 날이 어떤 날인지 아십니까?
에스더 3장 13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맡겨 왕의 각 지방에 보내니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
이 날은 유다인의 대적 악한 하만이 유다인을 진멸하기 위하여 제비를 뽑은 날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이 날은 사망의 날, 아무런 소망도 기대할 수 없는 죽는 날입니다. 하만이 악한 계략으로 아하수에로 왕을 구어 삶았고, 이 죽음의 법은 왕의 인장반지로 결제가 되어 취소할 수 없는 명령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시 본문 1절을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아달월 곧 열두째 달 십삼일은 왕의 어명을 시행하게 된 날이라 유다인의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 유다인이 도리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 날에”
“도리어”라고 합니다. 분명 같은 날인데 거기에는 반전이 있습니다. “도리어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들을 제거하게 된 그 날”이라고 합니다. 에스더 8장 11절을 보겠습니다.
“조서에는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
악한 하만의 계략은 다 들통이 났습니다. 그리고 전세가 역전이 되는데 또 다른 왕의 어명입니다. 처음의 왕의 어명은 죽음의 법이었지만, 두 번째 왕의 어명은 생명의 법입니다.
12월 13일은 페르시아에 반 유대주의자들이 유대인들을 죽이기 위한 날이었지만 하나님의 기막힌 반전은 대적을 맞서 싸울 수 있고 생명을 보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이 일에 가장 우두머리인 하만은 이미 9개월 전에 죽임을 당하고 나무에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유다인을 죽이기 위하여 제비 뽑은 12월 13일은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려워해야 할 사람들은 유다인들의 대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본문 1절 전반부를 보면 “유다인의 대적들이 그들을 제거하기를 바랐더니” 라고 말합니다. 자신들의 우두머리인 하만이 죽었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을 해치려는 마음은 여전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유다인들과의 싸움에서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왜냐면 하만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개인의 역량을 보면 충분한 힘과 권세를 가진 자였습니다. 아마도 유다인들을 해하려던 사람들도 하만과 비슷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겁니다. 그리고 여전히 유다인을 죽일 수 있는 법적인 근거, 첫 번째 조서가 아직도 유효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면이 오늘은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대적 원수 마귀는 여전히 우리를 향하여 적의를 품고 마지막 순간까지 성도들을 대적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의 말씀을 보면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라고 합니다. 얼핏 보면 사단 마귀의 권세가 위협적으로 보이고 실재로 우리는 종종 마귀의 간계로 넘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미 사탄마귀와 싸움에서 이미 이겼다는 겁니다.
사탄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음으로써 자신이 승리했다고 확신했겠지만, 그 확신은 3일을 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망의 권세를 깨뜨렸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의 승리를 모든 믿음의 백성들에게 주셨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자는 죄와 사망의 법에 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법 안에 있는 겁니다. 그래서 더이상 사탄 마귀의 권세와 죽음의 저주는 더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유다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그들의 우두머리 하만이 죽었습니다. 한 날에 유다인들을 몰살 시키려 했던 날은 더이상 두려움의 날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격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날입니다.
본문 2절을 보겠습니다. “유다인들이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 각 읍에 모여 자기들을 해하고자 한 자를 죽이려 하니 모든 민족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능히 막을 자가 없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승리의 여정은 본문 17절까지 이어집니다.
여기서 2가지를 주목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백성을 미워하는 자는 결단코 수치를 면할 수 없습니다. 시편 44편 7절을 보겠습니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
예전에 하만이 자신이 교만함을 무엇으로 나타냈냐면 자기 아들들로 나타냈습니다. 에스더 5장 11절입니다. “자기의 큰 영광과 자녀가 많은 것과 왕이 자기를 들어 왕의 모든 지방관이나 신하들보다 높인 것을 다 말하고”
하만은 자기의 큰 영광, 자녀가 많은 것 자기가 페르시아의 2자인 것들을 나열하면서 자신의 힘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면서 모르드개와 유다인들을 죽이는 날만 기다렸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반전은 이미 하만은 죽고 그 남은 아들들도 다 죽게 되었습니다.
본문 7절에서 9절에 보면 하만의 아들들의 이름이 상세하게 나옵니다. 그 하만의 아들들 역시 하만과 동일하게 유다인을 미워하고 죽이려고 했던 자들입니다. 이러한 하만의 남은 위협으로부터 하나님은 유다인을 지키고 오히려 대적에게 수치를 주었습니다.
본문 14절 보겠습니다. “왕이 그대로 행하기를 허락하고 조서를 수산에 내리니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가 매달리니라”
고대 근동에서는 죽을 자를 나무에 매다는 것은 망자에 대한 최고의 수치였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 시대에도 보면 여호수아를 대적했던 자들 특히 왕들의 시체들 나무에 달아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음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는 유다인들의 태도에 관한 특이점입니다.
본문 10절을 보겠습니다. “곧 함므다다의 손자요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열 아들을 죽였으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본문 15절을 보겠습니다. “아달월 십사일에도 수산에 있는 유다인이 모여 또 삼백 명을 수산에서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고”
마지막으로 본문 16절입니다. “왕의 각 지방에 있는 다른 유다인들이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대적들에게서 벗어나며 자기들을 미워하는 자 칠만 오천 명을 도륙하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세 구절을 살펴보면 반복되는 표현이 있습니다.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아니하였더라” 이것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의도적으로 분명한 메시지가 여기 담겨있습니다.
보통 고대 근동에서 전쟁에 승패를 따라서 이긴 자가 전리품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대적과 맞서 싸우고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일반적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모르드개의 조서를 내용에도 분명히 재산을 탈취하라고 쓰여졌습니다. 다시 에스더 8장 11절을 보겠습니다. “조서에는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
분명히 재산을 탈취하라고 언급되어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인들은 대적의 재산은 탈취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기는 믿음의 고백이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대적들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던 궁극적인 이유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겁니다. 유다인들은 이것을 고백하고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그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습니다.
마치 창세기 14장에 나오는 아브람의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입니다. 창세기 14장을 보면 당시에 사해 주변 5개 나라와 엘람 동맹국 간에 국제 전쟁이 일어납니다. 이 때에 아브람의 조카 롯이 전쟁포로로 붙잡혀 갑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집에 있던 사람 318명을 데리고 이 전장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조카 롯을 구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돔 왕이 아브람을 영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창세기 14장 21절입니다. “소돔 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가지라”
소돔 왕은 전쟁포로로 잡힌 자기 백성들을 돌려주고 그 남은 전리품은 아브람에게 가지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이를 거절합니다. 아브람의 표현으로 들메끈 한 가닥도 가지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전쟁포로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자신의 능력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전리품을 챙기지 않습니다.
에스더의 유다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대적에 손에 꼼짝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대적을 물리쳤습니다. 이 모든 공이 자기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라는 것을 철저하게 고백한 것입니다.
즉, 믿음의 백성들이 물질을 대한 태도를 통해서 그 믿음의 고백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기 때문에 전장의 전리품을 안챙길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반대로 나에게 주어진 물질도 얼마든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진짜 고백하는 사람은 물질에 있어서 특히 십일조와 감사헌금에 있어서 자유롭습니다.
우리 사랑하는 모든 성도들도 이와같이 물질에 있어서 자유함과 진정한 고백이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이 두 번째로 부림절에 관한 메시지 입니다.
본문 22절을 보겠습니다. “이 달 이 날에 유다인들이 대적에게서 벗어나서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으니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며 가난한 자를 구제하라 하매”
부림이란 말은 히브리어 “푸르”에서 시작됩니다. “제비뽑다”라는 말인데 이 푸르의 복수형이 푸림입니다. 이것을 한글로 음역하니깐 부림이라고 하고 또한 이것을 절기로 지켰기 때문에 부림절이라고 합니다.
유다인들에게 부림절은 하나님의 은혜로 대적에게서 벗어나 평안을 얻은 날,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된 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된 것을 기념합니다.
그래서 본문 27절에 보니깐 “뜻을 정하고 자기들과 자손과 자기들과 화합한 자들이 해마다 그 기록하고 정해 놓은 때 이 두 날을 이어서 지켜 폐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이 구원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서 대대손손 부림절을 지켜서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기념하게 하였습니다. 이것이 부림절의 정신입니다.
이 믿음의 고백은 오늘 사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림절의 영적인 의미가 우리 신앙생활 가운데도 동일하게 고백됩니다. 다시 본문 22절 봅시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고백은 우리에게 3가지 면으로 다가옵니다.
첫째는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할 때입니다. 에베소서 2장 3절보겠습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원래 우리의 본성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 소망없는 자들입니다. 슬픔과 애통만이 전부인 것이 예수님 믿기 전에 우리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그 은혜 안에 거하니깐 모든 것이 변화됩니다.
로마서 8장 2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첫번째 왕의 조서인 하만의 법은 죽음의 법이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왕의 명령으로 탄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모르드개가 작성한 왕의 조서는 생명의 법이었습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고 애통이 길한 날로 변했습니다.
우리도 복음이 말하는 생명의 법 때문에 더이상 애통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소망이 있습니다. 더 이상 사망의 법이 우리를 어찌하지 못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두번째는 우리가 죽을 때입니다. 어떤 사람이 죽음을 달갑게 여기겠습니까? 본성적으로 죽음은 두렵고 싫습니다. 왜냐하면 죽음 자체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죽기 위해 지어진 것이 아니였습니다. 죄 때문에 죄의 결과로 죽는 겁니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죽음이 싫고 죽음을 피하고 싶은 것이 모든 사람의 일반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가진 이 믿음 때문에 죽는 것도 더이상 슬픔과 애통이 아닙니다.
오히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이유는 죽음이 끝이 아니라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와 은혜의 복을 누리는 천국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면에서 죽는 것도 유익이라 말하고 자신은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고백할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곧 생명으로 바뀌고, 슬픔이 기쁨으로, 허무한 것들이 영원한 찬양으로 바뀌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세번째는 이 부림절의 영적인 의미가 매주 반복되는 주의 날 바로 주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반전의 역사의 최고 정점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그리고 부활입니다.
초대교회 시대부터 이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은 계속되어왔고 또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기까지 순종하시고 다시 사신 예수님 바로 이 주의 날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의 삶에 이 믿음의 고백과 부활의 소망이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